이번장에서도 역시 생각해볼 부분들이 참 많이 있었다.
그 첫번째다.
[방언]
보통 한국에서는 "방언받는다"라는 명목으로 굉장히 뭐랄까.. 기계적으로 뭔가 받기를 원한다. 사도행전2장을 연상하며.
하지만 정확한 과정으로는 내가 보기에 "방언을 받는다"는 굉장히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우리나라 사람의 오해가 없게 좀 더 단어를 변형해주자면 "거룩한 영의 충만함을 받는다."가 정확한 표현인것같다.
그리고 거룩한 영으로 충만함을 입자, 그 현상중에 하나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 "다른 언어로 말한다."라는 표현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생각해보면, 서로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표면적으로는 다른 언어인데 서로 이해가 되는 속성이였을까?
아니면 이 "말하는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거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은 100% 기도라고 그냥 생각할텐데, 문맥상 기도를 유추해볼 수 있는것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기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는 생각해볼 수있을것같다.
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것"과는 뭔가 결이 하여간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이 "말하는 것"을 행하는 장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것같다.
두번째
[성령이 임한 장소]
첫째, 우리가 통상생각하는 사도행전 1장 중반부에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에서 연결해서 있었는지
(마가의 다락방은 아니다. 최소한에 다른 성경에서 여기서 말하는것은 뭔가 공용으로 쓰고 있었던 곳이지 "마가의 다락방"이 아니다. 한국어 성경은 읽기가 난해해서 그런가 모르겠는데 진짜 교회에서 통상 알고있는것들이 성경을 보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것이거나 의미가 다른것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만약 이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한다면 후에 나오는 말씀에 "그때 성령을 받았던 마가의 다락방" 이런식으로 표현이 나올것이고, 그러면 마가의 다락방이 맞다.)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거는 좀 가능성이 없는 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성경 부분과 조합해봤을때, 이들이 1장에서 모인시기가 정확히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이였다면 무조건 그 다락방이겠지만, 그렇지 않을경우 하루든 이틀이든 시간적인 텀이 있게 된다면 분명 장소가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즉, 무언가 다른 장소에 모인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어떤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 (우리의 상식선에선 누군가의 집 같은 개념) 에 모였을 수도 있을것같다.
셋째, 하지만 뒤의 단서를 조합해볼때, "외부로 부터 단절된 공간"즉, 실내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외" 모두가 모이는 강당같은 곳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즉, 어쨌든 뭔가 말하기를 시작한 것같다. 예언의 일종이였던 것같기도하고, 구약에 보면 갑자기 뜬금없이 거룩한 영에 의해서 말하거나 예언하게 된 사례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각 나라의 말은 굉장히 범위가 다양했을 것이다. 동부유럽- 중앙아시아 - 북부아프리카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이들은 그것을 보고 놀란다. 그리고 낮술을 먹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된다.
즉, 이들의 말이 들리는 곳은 단절된 내부에서 너무나도 크고 분명하게 말을 하게 된다던지 아니면 공용공간인 강당같은 곳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보면 볼 수록 어떤 강당같은 곳이거나 아무튼 외부와 단절되지 않은 장소였다고 생각이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오순절".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보통 그냥 성령받은날로 단순히 알고있지만 제발좀.. 그러지 말아달라)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안식일을 7번 지킨 다음날. 즉 49일의 다음날인 50일째 되는 날로 알고있다.
물론 그 50일이 무엇의 시작이 되는 날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어떤 장소에 모였을 것이고
(어떤 특정 절기마다 모이고, 중요절기는 위치에 관계없이 모이려고 한다. 일례로 예수님이 어렸을때는 그 모임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있는것이 부모가 예수님을 잊어버린지 3일이 넘었는데, 그때쯤 잃어버린지 깨달았다고 한다. 즉, 그만큼 이들에게는 대규모로 민족 전체가 있는 것이 익숙한 일이였다고 생각된다.)
12~13절에 보면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다 놀랐다. 즉, 드문드문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다 같이 들을 수 있는 공간"이였다고 생각된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베드로가 반박을 한다.
생각을 해봐라. 만약 통상의 이미지처럼 1. 단절된 외부 (다락방) 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였다면 이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듣고, 베드로가 변론을 할까?
2. 근데 또 희안한건 2장 2절에 보면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나온다. 즉,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 성전을 "온 집"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겠지만 음... 정말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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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단락을 정리해보자면, 성령을 충만함을 입은 장소의 후보군은
1. 1장에서 말하던 "그들이 유하던 다락방"
2. 특정 집
3. 집이라고 지칭 될 수 있는 공통의 공간
일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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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위에서 디테일하게 쪼개느냐면, 이 디테일함이 하나둘씩 모이게되면 인식자체가 변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디테일로 인해서 어떤 인물의 행동들의 행동이유가 달라지는데에 충분하니깐.
그리고 그 디테일은 성경안에 기반되어야지, 어떤 상상에 기반되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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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취한 것에 대한 오해를 베드로가 풀고자 했을때, 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인식을 명확히 알 수 있다.
14절부터 41절을 보면 이들에게는 그때가 "말세" 즉, 세상의 끝에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믿고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점점 변해갔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봐라 "곧 너는 죽을거야"라고 정말 무서운 사람이 말했는데, 오늘도 내일도 내일모레도 안죽고 그렇게 일년이고 이년이고 10년이 지난다고 생각해봐라. 두렵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딱히 두렵진 않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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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생각해볼 포인트는 "세상의 끝날"이 이때는 아니였다.
즉, 아직 끝날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살아있다.
즉, 끝날이 오기까지의 징조는 아직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상중 하나가 요엘서에서 말하게된 기상천외한 일도 있을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봤을때 세상의 끝은 잔혹하고 상상은 되지만 체감조차 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믿는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실 어떤 징조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요엘서에서 말한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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