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3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챕터이다.
다윗의 인생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정말 많았구나. 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가 혼자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다윗을 도우려 했던 사람들은 왜, 어떻게 도우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도 정말 많이 든다.
더불어서 어떤 사람은 사자를 때려잡았다고 한다.
음.. 도구를 사용한다면 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의 정신상태는 지금의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니깐
쳐죽였다고는 하지만 한국어 표현이 그렇고, 추측하기로는 칼이든 창이든 써서 죽였을 것이라고 그냥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영어만 보더라도 눈 속에 내려가서 "죽였다"고 되어있다.
쳐죽였다가 아니고
음.. 그리고 싸움에 있어서 정말 수십, 수백명을 혼자서 죽인것으로 묘사되는게 몇명 나온다.
아무리 중장거리의 무기인 활, 총같은게 익숙하지 않다 한들 그게 쉬웠겠는가
어떤 사람은 칼이 손에 붙을 정도로 피곤하게 싸웠다고도 한다.
정말 대단하다.
누가복음 23
여기서는 유대인의 무지성 "죽여달라"로 인해서 죽게된 예수님의 내용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데려갔을때 빌라도는 딱히 예수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신을 묻고, 갈릴리라고 하니, 해당 관할 구역의 헤롯에게 이송시킨다.
정치적입장에서 빌라도는 앞뒤로 봤을때 굉장히 힘이 크지 않았고, 양쪽의 눈치를 잘 보면서 줄다리기를 잘 해야지
유지가 되는 입장이였거나, 최소한 그런 포지션을 본인 스스로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였음에는 분명하다.
아무튼 헤롯에게 예수님이 이송되게 되었고
헤롯은 예수님에게 매우 큰 흥미가 있었다.
이전부터 찾아보고 싶었다고한다.
그러고는 질문을 여러가지 하지만 예수님이 답변하지 않으니
그냥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다고 한다. 뭔가 우스운 느낌이 나는 망토같은것을 입히고는.
그리고 빌라도와 헤롯은 본래 원수같은 사이였으나, 이 날은 친해졌다고 한다.
이 모습은 마치 고등학교 시절때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고 짖궂은 장난을 치기를 좋아하는 애들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친해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돌아오자, 빌라도는 그냥 예수님을 놓아주길 원한다.
그러나 무지성 유대인의 외침에 의해서 "최소한에 그러면 때려서 보내줄게"
라고 하고 마구 팬다.
정말 잔인한 도구들을 써서.
그리고 패고 나서 "이젠 됬지? 보내준다?"
라고 한다.
유대인이 너무 무지성으로 하니깐 빌라도도 딴에는 최선의 수 라고 생각했는지,
많은 수감자들이 있었을텐데 그 중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아무튼 사회적으로 질이 매우 좋지 않은 사람 (바라바)을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라고 한다.
어떤 광복절특사처럼 특별한 날이 다가왔는데, 그때 어떤 죄든 사해주고 방면해주는 제도가 있었던것같다.
보통의 상식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죄가 없다는것이 명백하며 그만큼 패버린데다가 반죽음이 되어있는 사람.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 중에 누굴 풀어야 하는가?
라고 하면 핑계를 대더라도 아무튼 전자가 올바르지 않다는 걸 알것이다.
그러나 그냥 끊임없이 예수를 죽이라고 해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한다.
유대인의 입장은 예수님의 심문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고, 때가 이를때에 너희가 보게 되리라. 내가 그의 권능의 오른쪽에 있어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이라는 식으로 한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겨서 + 바리새인들은 본인의 입지와 권위가 흔들리는게 싫어서 무지성 빌드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예수님은 죽으러 올라가신다.
그 몸상태에 절대 들기 쉽지 않은, 정상적인 몸 상태의 성인도 들고올라가기 힘든 크기와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다.
한가지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매우 많은 여인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았다는 것이다.
아마 당시의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병자와 약자에게 더 공감가는 말씀이였다고 보인다.
그리고 여자도 그 중 대표적인 영역이였던 것 같고.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도 했다.
여자가 그렇게 많이 따르고, 30대 초반의 남자인데 지금이야 이렇게 아파서 솔직히 딴 생각이 안들겠지만
평소에는 그래도 맘에 드는 사람 한 두명쯤은 없었을까?
아무튼 십자가에 달려서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같이 예수님의 양옆에 달린 죄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했다고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다르다.
한명은 정죄하고, 한명은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이렇게 치르는게 마땅한 죄인이지만, 이사람은 아니다."
"오늘날 당신의 나라에 갈때에 나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오늘날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고 한다.
정말 극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 장면만 보더라도 몇가지 생각이 든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천국에 함께 갈것이다.
라고 선언받은 사람은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중죄인이였다 = 최소 국가급 실수, 사기 혹은 단순 살인 아니고 악독살인 등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시에는 최 악의 1등급 형벌이였던 것으로 알고있으니깐.
그 말은 좀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기를 약속받은 사람은 그 십자가에 메달리는 순간까지 죄지은 자였으나,
한번의 마지막 고백으로 인하여 천국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너희가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라."
외에도 뉘앙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분명히 성경에서는 말한다.
그러면 몇가지를 연결해서 더 생각해볼 수가 있다.
1.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범죄하더라도 구원을 얻는것은 가능하다.
2. 삶의 중간에 구원을 얻더라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을 몇번씩, 구조적으로 뜯어보면서 읽다보면 뭔가 알게되는 바가 있는것같다.
하나님은 정말로 인간을 죄악에서 건지시길 원하신다는 핵심과
그럼에도 무언가 반복되는 죄악의 근본적 생각과, 선택에 의해서 뭔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것.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 구원을 얻는 자도 분명 있겠지만
삶의 과정에서 구원을 얻는자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 자체에 또한 이유가 있다고.
음..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생각을 해보자면 그런것같다.
종말영화를 종종 보게되면 티켓을 구하게 된다.
티켓은 구원을 의미한다고 본다.
일종의 방주에 올라타기 위해선 티켓이 필요할때, 재난이 닥치기 일보직전에 티켓을 얻고 승선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방주에 올라타기 한참전에 티켓이 있음에도 잃어버리거나 분실되거나 파손되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표면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이게 유의미한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작동 원리는 정말 심오하다. 이런 간단 설명으로는 설명자체가 안되는 그런
뭔가 다르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통상 생각하기 쉬운
타 종교의 고행과는 다소 다른 부분이 분명하다.
음... 정확히 표현하자면 겉 모습은 뭔가 "비슷"은 해보이는데,
그 안에서 돌아가는 순환원리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랄까..
음.. 오늘도 말씀을 읽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개발일지 > 임시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01.16 멀티캠퍼스 프로젝트형 AI 시작 하루전 (0) | 2022.01.16 |
---|---|
2022.01.16 주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0) | 2022.01.16 |
2022.01.15 유데미 파이썬 부트캠프 Day3-1 (0) | 2022.01.15 |
2022.01.14 사무엘하 22장, 누가복음22장 (0) | 2022.01.14 |
2022.01.13 멀티캠퍼스로 결정! (0) | 2022.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