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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일지/임시카테고리

2022.02.04 열왕기상 10장, 요한복음 10장

by 다니엘의 개발 이야기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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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0장

 

읽어보니 솔로몬은 당대에 전 세계를 비하여봐도 그 보다 부가 많고 지혜가 많은자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마치 전설과도 같이 남아있는 신기루와 같이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보통 천재와도 같다고 하는 사람이

아르키메데스, 함부라비왕, 알렉산더왕,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등

공통적으로 오늘날 까지 그들의 산물이 남아있다. 그래서 시간이 매우 많이 지났음에도

그들의 지혜를 되뇌이고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솔로몬은 어떠한가?

솔로몬의 지혜라고 해봤자 사실 대표적으로 아이를 두 어머니중 진짜 어머니에게 준것 외에는

기록에 남아있는게 없다.

그리고 그 외에도 관부과세 정책 등으로 인해서 큰 부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 실질적으로

그 부와 지혜를 체감할 수 있는건 어느하나도 없다.

지혜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솔로몬인데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20년간 성전과 궁전을 건축했다고 하길래

"와.. 이 사람은 진짜 스케일이 남다르구나" 싶었다.

이게 유지가 되나? 싶으면서도 그게 기록을 보면 국가운영에 있어서 큰 차질이 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은이 돌같이 많고 백향목이 뽕나무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은이 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이스라엘의 힘이 이때 있었다고 보인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실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번 나타나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 말과 법도를 너와 너의 자손들이 지켜 행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튼 좀 저주식으로 뭔가 재앙이 닥칠거다"

라는식으로 하셨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솔로몬이 중말년에 우상을 엄청나게 섬기게 하는 체제를 내비두니 자신의 자식대에 가서 이스라엘은 갈라졌고

이때부터 나락을 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줄거면 주고 말거면 말지 왜 저런 조건을 걸어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느냐고"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저 조건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결혼을 할때 서로 약속을 한다.

"서로 평생 사랑하고" 이 말에 내포되어있는 의미는 바람피지마. 바람피면 너와 나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할거야.

라는것은 온 세계사람들이 사실은 알고있다.

 

하지만 어떠한가? 결혼 후에도 바람피는 사람이 정말 급격히 많아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바람의 시작이 굉장히 죄스럽고 숨어서해야하고 정말 음지의 음지느낌이였다면

2015년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서양의 그런 정신들이 많이 유입되다보니 (물론 그 전에도 계속 누적되어왔다)

지금은 바람을 피는게 일종의 "진정한 사랑을 찾기위한 과정"과도 같이 당사자들에게는 아름답게 치부된다.

 

그 결과로 어떻게 되는가?

뭐 당사자들도 무너질대로 무너지겠지만 자식이 있다면 그건 지옥이상의 의미다.

보통 서양사람들을 보면 이혼으로 부터 빚어지는 마음의 상처로 인한 근본적인 문제가 내가봤을땐 80%이상은 되는것같다.

그러면서도 바람은 마치 달콤한 사탕과도 같다.

그 기분을 너무 잘 알고있다. 사실 바람의 기회가 많은 사람일 수록, 매력적인 사람을 접촉하는 일이 많은 일을 할 수록 바람의 유혹은 그 만큼 증가한다는거. 너무 잘알고 있다.

 

배우자가 있든, 여자친구가 있든 "이 부분은 내 여자보다 더 좋은데?", "이 부분은 내 연인보다 매력적인데?"

하나 둘씩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거에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변해간다.

그러다보면 내 연인이 뭘 할때에도 "아 이사람보단 그 사람이 나은데, 헤어질까?"

이런 생각도 너무 쉽게 하게 된다.

내 인생동안 연애를 수십번 해오다 보니 솔직하게 느끼는 점이다.

단지 그걸 행동으로 옮기느냐 안 옮기느냐의 문제지 정말 이건 사회를 뒤흔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신상태가 박혀있는 사회에선 결혼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고 이혼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그나마 아이를 낳고 버리기라도 하지만 (최소한에 생명은 낳으니깐, 낙태는 정말 그것보다 끔찍한 것이 없다.)

동양에서는 문화적 융합을 이루며 아무렇지도 않게 낙태를 하고 오히려 더 악날해진 구조가 되어버렸다.

 

모두다 진정한 행복을 바라왔다. 하지만 약속이 깨어지고 나니 내가 파괴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그게 번져서 지역이, 나라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연인이라고 다르지 않고 부부라고 다르지 않다.

요즘엔 솔직히 10대든 뭐든 상관없이 성관계는 기본중의 기본이 되어버린 사회니깐.

지금은 그저 쾌락만을 즐기는 사회로 변모해버리고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때로는 안타까우며, 때로는 그 쾌락을 나도 쫓고 싶은 마음이 참으로 이질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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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예수님의 핵심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에 대한 좀 더 부연 설명을 해주시는 느낌이였다.

"양의 문으로 통하지 않고는 절도요. 강도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양의문은 예수님 본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사람,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의 "신을 믿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의 정체성이자 미움을 받은 요소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믿는다. 신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마치 부를 이루는 것과 동일시 되어서

"방법은 상관없어, 나는 돈을 벌고 있고 돈을 원할 뿐이야" 라고 하는것과 같은 원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방주가 여러개라면 모를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방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면,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지 그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것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왔다.

때문에 이 말이 나에겐 진리일지 모른다.

 

어떤이는 이슬람의 가정에서 자라왔고

어떤이는 불교의 가정에서 자라오는등

세상에 종교가 너무나도 많다.

 

그만큼 진리를 판단하는 잣대가 광범위하게 다르다.

그러다보면 논리의 싸움이 아니다. 믿음의 싸움이다.

논리라는 것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진실이 될수도, 거짓이 될수도 있는건 논리에 있어서 기본중에 기본이니깐.

 

아무튼 예수님은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하신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면 도망가느니라."

"너희들이 깨닫지 못함은 너희가 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때로는 성경을 읽을때 너무 와닿는 말씀으로 알아듣겠다. 마치 정말 내가 예수님의 양이된 느낌이 들때 너무 기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맹인과도 같고 귀머거리와도 같은 기분이 들때가 꽤 자주 있다.

그럴때면 꼭 나는 범죄를 하였을때였다.

범죄는 정말 다양하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자마다 이미 음행하였느니라", "마음에 00한 자마다 이미 00하였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자신이 행동으로 안한다 할지언정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결한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나의 범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길 희망하고

앉은뱅이와 맹인을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보게하셨던 예수님의 상황에서 내가 그들이 된 마음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

언제나 그러길 싫지만 언제나 용서해주신다.

이 부분이 어느 구간까지는 정말 나를 미치게했다.

그 자괴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정도다.

지금은 약간의 무뎌짐과 감사함, 죄책감등의 마음이 융합된 느낌이랄까..

 

이유야 어찌되었고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는 예수님의 양으로써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내 가장 큰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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