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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일지/임시카테고리

22.02.17 [요한복음 16장] 떠나시려는 예수님

by 다니엘의 개발 이야기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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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정말 이전장 즈음 부터 해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신다.

 

이런 떠날 것을 미리 "암시"가 아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 말인 즉슨 실족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심지어 유대교로부터 출교 -> 생활을 영위하는것 자체가 매우 힘들어짐. 기존에 구할수있는 직업이 100개였다면, 출교후는 1,2개정도 구할수 있을까 말까? 라고 보면됨. 따라서 보통은 강제 창업을 하는경우가 많음.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라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고나서 기하급수적으로 신도가 불어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에 이단취급을 받던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당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콜로세움에서 사자, 검투사 등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 신자 뿐 아니라. 최소한

현 시점 전세계인구 거의 80억명중 20억명 이상은 알고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간이 약간 더 지나고 나서는 모든 재앙이 있을때마다. 이들의 탓이라고 여겨지며

고문, 화형, 십자가형 등등으로 죽은이들은 기록에도 매우 찾기 쉬울정도로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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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이 가는것이 유익하다고 하셨다.

그래야 자신이 보혜사 거룩한 영을 보낸다고 하셨으니깐.

거룩한 영의 역할은 몇가지가 있는데.

1.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것이며

2. 거룩한 영을 받은자 모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고

3.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것을 말하며, 장래의 일을 알게 될것이라고 한다.

4. 예수님의 것으로 거룩한 영을 받은 자들에게 알리신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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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근처에서는 세상은 기뻐하겠으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근심하고 애통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해산하는 여인이 해산의 시기가 다가오면 근심하지만, 그 이후로는 출산으로 인하여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온 기쁨으로 인하여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 처럼 기쁠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구하는것은 무엇이든지 주신다고 하신다.

이러한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셨다는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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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로도 "어떤일이 있을것이지만 괜찮아. 그거는 이런걸로 처리할 수 있어"

의 유형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너희는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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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중간중간에 그런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차피 다 주셨고 용기든 뭐든 다 주셨을텐데 왜 흩어졌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다 흩어졌을까?"

 

그런데 살다보니 점점 알게되는 것 같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도 보혜사로 인해서 진리의 가운데에 머물다 보면 정말 빠른시간안에 나태해지고 내 위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들이 생긴다. 그것이 점점 나아지곤 있다곤 하나, 그것은 과거의 나에 비교해서일 뿐이지, 여전히 그런 현상들은 남아있다.

정말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면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을 따라 사는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쉽고,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쁘고 감사한. 이런것들이 오가는지 모른다.

 

최근에 설겆이를 하며 은하철도 999 리뷰영상을 봤다.

그리고 은하철도 999에서의 삶은 현실성이 없다고 할 지언정 원리는 사실 간단했다.

더 이상 노력할 필요없이 모든것이 공급되고 모든것이 부족함이 없게되면, 누구하나 빠짐없이 "노력"이란걸 하지 않게 되고 그대로 고통을 받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삶의 반복이 고독이라는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고

이내 새로운것을 찾게된다.

새로운 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자신 스스로가 죽기를 원하는 기계인간들이 나온다.

 

삶이라는것이 정말 어처구니 없을정도로 잘 만들어져있다.

고통 없이 어찌 기쁨을 느낄수있겠으며,

그 기쁨만이 지속될때 인간은 얼마나 망가지는가.

고통과 기쁨.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 인간이나 이 굴레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부자든 빈자든.

 

그러면 또 한편으론 그런생각도 든다.

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하였을때,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고 한들 최초의 약속 어김에 따른 댓가는 사실 하나님 재량껏 판단하는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냥 죽여버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든지, 기억을 없애버리고 그냥 밖에 버리던가 여러가지 경우를 생각해볼수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

남자에게 저주 하나. 평생을 이어나가는 고통, "땀을 흘려 밭의 소산을 먹고 살아갈 것이다"라고 하셨고

여자에게 저주 하나. 해산하는 고통을 주셨다.

재밌는것은 요즘 뇌가 좀 반쪽 찌그러진 사람들은 애기만 띡 낳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애가 태어나면 또다른 시작이 시작된다. 그들을 길러내야하고 챙겨야하지. 어느 일정 수준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옛날에는 14살~22살쯤이면 성장을 마치고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 처럼 밭의 소산을 먹으며 살아갈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역설적으로 그런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버리자, 끝없는 공허함에 대한 고독감이 오고, 그것을 채우고자 영상, 게임등. 현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것들로 채워가고 하여간 이것말고도 무수히 많은 부작용이 생기며 요즘에는 40살이 되어도 성장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은것같다.

 

즉, 인생에 고통과 기쁨은 매우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 고통으로 인해서 죽기도. 기쁨으로 인해서 중요한것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핵심은 "잃어버렸다"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정말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이 본능적으로든 머리로는 "유한하다"라는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남자는 가정을 가지고 평생을 먹고살수있도록 하는것

여자는 가정을 가지고 평생을 아이를 키우는 것

그것이 내가 봐온 성경에서 두 세번째로 정의된 인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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